술, 야망 그리고 법정에서의 삶

저자: 서울 율촌 김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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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판사가 고객 불신과 한국의 음주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다

우리 가족은 제가 항상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제가 법대에 들어가자 매우 기뻐했습니다. 엄마의 친구는 우리에게 축하 전화를 했고 엄마에게 “그 애 결혼은 어떻게 시킬 거니?”라고 바로 물어봤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사법시험을 통과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합격률은 3%였고 매년 300명만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매년 1,700명에서 2,000명의 변호사가 자격을 취득하고 있습니다.

김새윤 변호사와 가족
김새윤 변호사와 가족

시험에 통과한 후 2년 동안은 한국 대법원에서 관리하는 사법연수원(JRTI)에 등록해야 합니다. 일단 그 단계까지 가면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판사나 검사 또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법연수원 정원 300명 중 여자는 19명이었습니다. 모두가 우리에게 잘해주었고 누구도 차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동료이자 함께 가야 할 동기로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25세에 판사가 되었고 7년간 근무한 후 개인 변호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한 판사는 여자 판사는 사람이 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선고가 너무 가혹할 수 있기 때문에 형사소송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농담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한 발언도 허용되었습니다. 그 판사가 지금 그런 농담을 한다면 상당한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판사석에 앉았을 때는 누구도 저에게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판사석이 어느 정도 저를 보호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개인 변호사업을 시작한 첫날, 저는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60세 남성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해야 했고, 그 남자는 걸어 들어오면서 “아니 이런, 여자잖아. 여자가 사건에 대해 뭘 알겠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전문적이고 교양 있는 사업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 없이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사건은 아파트 단지와 관련된 분쟁이었고 그는 아파트 관리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그와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하면서 제가 이전 변호사보다 이 사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고객과 와인을 마시고 식사를 하는 문화가 매우 강합니다. 그 당시 우리는 따라야 할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들처럼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많이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년 동안 저는 다른 남자 변호사들과 똑같이 마셨기 때문에 동료들은 저를 차별하지 않았고 고객에게 “이 여자는 술도 못해요!”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만약 제가 계속 술을 마신다면 가정도 돌볼 수 없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고객에게 아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 8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여겼지만, 그들도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노력하는 엄마들의 마음에 익숙해질 때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과 술 마시는 일을 중단했고 주말을 자녀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때가 바로 제가 국제 중재 업무 능력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던 시기입니다.

저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두에게 금주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두려워하지 마. 경력을 망치게 되진 않을 거야”라고 스스로 되뇌었습니다.

아시아 전역의 여성 선임 변호사들은 보다 포괄적인 변호사업을 위한 성공, 투쟁 및 전략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다음의 개인 이야기 모자이크(영문)는 특정 아시아 관할 지역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사례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들을 뭉치게 하는 공통적인 경험도 다양하게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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